20대 후반에 돌아보는 쉽의 인생사
Part 1: 꿈은 없구요, 공부는 잘하고 싶어요
내 10대 시절은 고등학교 1학년 1학기 영어 내신 등급에 ‘1’이라는 숫자를 본 이후부터 시작되었다. 그때 나는 그 숫자가 너무 아름다워 보였고 또 갖고 싶었다. 그 이후로 성적표에 ‘1’이라는 숫자를 보려고 공부했다. 이것이 문제였다. 단순히 성적을 잘 받기 위한 공부만 하다 보니, 내가 무엇을 위해 공부하는지, 앞으로 살면서 무엇을 하고 싶은지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 않았다. 막연히 남들이 문과의 탑이라고 하는 경영학과에 가야겠다고만 생각했다. 입시가 끝나고 재수를 하고 싶었지만, 왜인지 부모님은 재수를 시켜주시지 않으셨다. 대학 입시에 미끄러졌다고 생각하며 한없이 울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가게 된 대학교는 고2 때 부모님께 가고 싶다고 말씀드렸던 대학교였다.
Part 2: 낭만적인 컴퓨터공학
내가 타게 된 미끄럼틀의 방향은 바닥이 아닌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1학년 때는 무전공으로 여러 가지 전공 수업을 들어보고 전공을 정할 수 있었다. 법학, 경제학, 심리학, 철학 공부는 너무 재밌었으나, 전망, 흥미, 교수님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전공으로는 선택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들어본 파이썬 수업은 그동안 내가 해오던 공부 방식과는 너무 달라서 어려웠다. 그치만 도서관에서 과제를 하다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으면 밖에 나가 학교를 한 바퀴 돌면서 문제에 대해 생각하고, 어쩌다 방법이 떠오르면 다시 자리로 돌아가서 문제를 풀었던 그날이 좋은 느낌으로 남았다. 같은 수업을 듣는 친구는 구글에 검색해서 답을 보고 과제를 제출했다는데, 혼자서 생각해서 문제를 푼 나는 꽤 괜찮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전공으로 컴퓨터공학을 선택하게 되었다. 하지만 과연 이 길이 행복할까 하는 걱정은 있었다. 그 당시에 내 생각으로 공학 공부는 칙칙하고, 재미없고, 낭만도 없을 것 같았다.
감사하게도 그런 내 걱정은 기우였다. IT 동아리에서 좋은 사람들과 같이 재밌게 스터디하고, 인생에서 제일 존경하는 교수님을 만났고, 좋은 팀원들과 밤새서 과제도 하고, 무엇보다 사랑하는 친구들도 만났다. 3학년(사망년) 때 폭풍 같은 전공 수업들을 듣다가 중도 휴학의 위기도 있었으나, 이 꽉 깨물고 버텨서 이겨내는 값진 경험도 했다. 참 낭만적인 대학 시절을 보냈다.
Part 3: 앞으로 개발자로 살고 싶어
어두운 면도 있어야 진짜 낭만적이라고 할 수 있다. 잘하는 사람들 옆에 있다보니, 나는 왜 저 사람들처럼 독하지도 않고, 진로를 적극적으로 찾지 않을까 자책하기만 했다. 그렇게 눈떠보니 4학년이 되었고, 앞으로 뭐하고 살고 싶은지 생각해봤다. 열심히 존경하는 교수님의 뒷꽁무니 쫓아다니며 들은 얘기가 있어서 그런지, 나는 앞으로 ‘개발자’의 인생을 살고 싶었다. 그러면 계속해서 성장하고 발전하는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뭐하나 제대로 준비된 것도 없었지만, 일단 커넥트재단의 부스트캠프에 지원했고 감사하게도 웹을 공부하는 기회가 생겼다. 부스트캠프 이후로는 모든게 빠르게 지나갔다. 웹 개발을 공부하게 되었고, 인턴의 기회를 잡았고, 말도 안되게 지금의 회사에 합격하게 되었다. 재택근무라서 얼굴을 직접 마주하지는 못했지만, 구글 밋으로도 전해지는 따스함과 프로페셔널함을 갖춘 동료분들과 일할 수 있게 되었다.
Part 4: 인생에서 내가 놓친 것
나는 IT 대기업에 취업했고, 삼수한 동생은 부모님이 자랑스러워할 만한 대학교에 입학했다. 우리 집은 자애로운 부모님 아래서 반듯하게 자란 나와 동생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22년 4월 어느 평화로운 토요일 아침, 가족 톡방에 동생이 중증 우울증이라는 얘기가 나왔다. 상황 파악이 잘 안 되고 내 머리로는 이해도 안 되었다. 중증 우울증에서 '중증'이라는 말이 중간 정도의 우울증이라는 건가 싶었다. 내가 자애롭다고 생각한 부모님은 당신들의 자랑스러운 아들의 병을 받아들이지 못하셨다. 나도 갑작스러운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지만, 그때부터 동생이라는 존재에 대해 인식하기 시작했다.
바로 주말에 동생을 만나서 얘기를 나누었다. 삼수하는 동안 어떤 일들이 있었고, 어떤 마음이었으며, 동생이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알게 되었다. 아래 사진은 그때 찍은 사진이다. 내 눈에는 따스한 햇살과 형형색색의 꽃들이 예쁘게 핀 4월의 그 거리가 동생에게는 아이폰 흐림 필터를 씌운 것처럼 보인다고 했다.
이 사건이 있은 후에 내가 인생에서 놓친 것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내가 그동안 얼마나 나만 생각하고 살았는지, 내가 이 애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게되었다. 무엇보다 인생에서 단지 나만 잘되는 것, 성공만이 중요한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주변의 도움도 많이 받으면서, 혼자서 꿋꿋하게 살아온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의지하는 법도 배웠다.
작년 말에 결코 쉽지 않았던 치료 과정이 끝났다. 처음엔 얼마나 오래 걸릴지 몰라서 불안했는데, 누구보다 강한 동생이 잘 이겨내주어서 1년 반만에 모든 약을 끊게 되었다. 예전에는 이 얘기만하면 눈물이 나왔고 숨겨야 하는건가 싶었지만, 지금은 이렇게 공개된 곳에 글을 쓸 만큼 단단해진 것 같다. 이제 더이상 자애로운 부모님과 반듯하게 자란 나와 동생이라는 가족 신화는 나에게 없다. 각자의 욕심과 고집이 가득하고, 서로의 부족한 점은 선명하게 보는 가족이다. 그치만 나는 이걸 알게된 지금이 더 좋다. 답답한 눈꺼풀이 한 겹 벗겨진 것 같다. 동생의 수고로 값비싼 것들을 알게 되었으니, 이 글을 읽는 분들은 부디 돌아가지 마시길 바란다.
Part 5: ‘뭐든 좋으니 자랑할 거 만들어와’
회사에서 리더님과 원온원을 하면서 지금 어떤 것을 잘하고 있는건지 여쭤보셨는데, 나는 자신감 없이 잘하는게 없는 것 같다고 대답했다. 리더님은 뭐라도 좋으니 자랑할거 만들어서 오라고 하셨다. 개발과 관련된 것이 아니어도 된다고 하셨다. 뭐든 자랑할거 만들려고 시작한게 클라이밍이다. 안타깝게도 근육이 워낙 없어서 벽타기는 잘 못했지만, 운동에서 성취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클라이밍 이후로 헬스, 필라테스를 거쳐 지금은 크로스핏, 러닝, 수영을 하고 있다.
내 인생에는 ‘꾸준함’과 꾸준함에서 오는 ‘성취감’이라는게 없었다. 운동을 시작하고 부터는 매일 운동을 해서 생기는 ‘성취감’과 그런 하루하루가 쌓여 생긴 ‘꾸준함’이 나에게도 있다는게 너무 자랑스럽다.
운동을 통해 배운 것이 몇 가지 있다. 첫 번째는 기록이 주는 힘이 크다는 것이다. 그냥 운동할 때보다 내가 언제 어느 정도 운동했는지 기록하면, 그 기록을 채우기 위해 운동하게 된다. 그리고 그 기록이 쌓여서 나의 뿌듯함이 되고, 또다시 운동하게 된다. 기록은 지속할 수 있는 힘이 되어준다.
두 번째는 지루한 과정을 참고 하다 보면 목표는 달성된다는 것이다. 크로스핏에서는 ‘점핑잭 100개’ 같은 오늘의 운동 목표가 주어진다. 말도 안 되는 것 같지만, 일단 WOD가 시작되면 ‘일단 20개만 하자, 10개만 더 하고 쉬자, 벌써 80이네? 100개 채웠다!’의 경험을 하게 된다. 지루하고 힘든 순간이지만 일단 하고 나면 카운트는 차곡차곡 올라가고 결국에는 목표를 달성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그냥 하다 보면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원래 나는 물에도 못 떴고, 물을 싫어했다. 강습에서는 수영해서 앞으로 가야 하는데, 물에 눕는 순간 그대로 가라앉아버리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그냥 걸어간 적도 여러 번이다. 그랬던 내가 어느 날부터는 물에 몸을 던질 수 있게 되었고, 평영, 배영, 접영까지 할 수 있게 되었다. 특별히 뭔가를 한 건 아니었다. 그냥 출석만 했는데 (결석이 더 많았다), 하루하루가 쌓이니 이전보다 더 나아지게 되었다.
Part 6: 그 다음은?
운동을 통해 배운 게 있으니, 이걸 개발 공부에도 써먹고 싶다. 취준생 때만큼의 열정은 사그라든 것 같다. 하지만 ‘기록’과 ‘꾸준함’을 무기로 하면 개발도 다음 단계를 성취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다음 단계가 뭔지 잘 모르겠어서 이걸 찾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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